망가 (忘歌) – 2004년

망가

그리운 날에는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한다

깊은 밤, 잠 못 들 때면,
선홍빛, 채 아물지 못한 상처를 조심스레 열고서
발 끝부터 가만히 온 몸을 잠기운다

부유하는 수 많은 기억의 파편 속에서
간신히 앙금지려는 그대 모습
한 조각, 한조각 모아 안고서

아직도 새파랗게 날이 선 그대 조각에
살이 찢기우고, 피가 흐르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기까지

끝끝내 놓지 못하고 건져보지만

눈부신 햇살아래
흔적하나 남김없이
모두 사라져버리고

어느 새 곁에 선 익숙한 바람만이
가만히 제자리로 지친 등을 떠민다

그리운 밤에는
그리운 사람을 사무치게 사무치게 그리워한다

– 2004년 3월 21일

아침 풍경 – 2001년

아침 풍경

지난 밤 내린 비로 아침 길이 젖어 있다.

젖은 길 위, 젖은 풍경 속에 빌딩들은 은빛으로 빛나는데,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은 왜 이렇게 초라한지.

돌아보면 언제나 아쉬운 것들 뿐인데
눈 앞에는 막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무심히 지나치는 거리 위에서도
얼마나 많은 미련들이 남겨져 있는 걸까.

한 해 한 해 지날 수록
어리석었던 지난 날들이 문득 문득 떠올라
홀로 걷다 무겁게 한숨 뱉는 날이 많다.

지혜롭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는게
이렇게 괴로운 줄 이제야 알았다는,
깨닳음아닌 깨닳음으로 잠시 미소 지었다가,

고개 한 번 가로젓고 인파들 사이로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한다.

– 2001년 8월 8일 아침

여름 비 – 2001년 6월

여름 비

집을 나서는 길에는
머리 위까지 낮아진 하늘이
성긴 빗방울을 떨구고 있었다.

저 너른 가슴으로도 하늘은
품고 있지 못할
슬픔, 괴로움, 안타까움들이 있는 걸까.

빗 방울 속의 수많은 나는
아스팔트 위로,
인파들의 우산 위로,
미처 준비치 못한 이들의
민망한 옷자락 위로 떨어지고,

나는 가만이 고개를 들어
긴 여정을 마치고 힘없이 돌아온
나를 맞는다.

– 2001년 6월 –

다시 서시 – 1996년

다시 서시

갓 태어난
나의 시편엔
어두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새파란
나의 시선이
그림자로만 맴도는 건
열 아홉의 나이 탓일까요,
외로 자란 마음 탓일까요.

쓸쓸해진 마음 접고
자리에 앉아 봅니다.

나도 이젠
맑은 소리로
밝은 가락을 읊조리렵니다.

– 1996년 –

도도새 – 1996년 봄

도도새

중력을 느끼기 시작할 즈음부터
우리는
기어다녔다.

모리티우스 섬.

대지를 무릎 설 만큼
하늘의 필요를 느끼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날개는 삭아들어가고,
하늘을 멀어져가고,
그리고
땅에서의 안주는 편해져만 갔다.

한 발의 총성이 울릴 때까지,
섬이 세상에 펼쳐질 때까지,
우리는
아무 것도 몰랐다.

중력을 느끼기 시작할 즈음부터
우리는
장미빛 철창 속으로
그렇게
기어만 갔었다.

– 1996년 봄 –

결혼이야기

밤새 프로젝트를 하고 아침에 들어와 잠이 든 사이에 모처럼 재미난 꿈을 꾸었다.

꿈 속의 나는 결혼 1~2년차 정도 되어보이는 남편이었고
아내와 다툼이 있어 며칠 간 소원해져 있는 상태였다.
애는 아직 없는 것 같았고,
친정집이 가까운지 친정 부모님들이 자주 왕래하는 듯 보였다.

뚱해있는 아내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 이리 저리 애를 쓰다
결국에는 화해하고 해피엔딩,
그리고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현실로 복귀

요 며칠 새 결혼 이야기를 많이 들은 탓인가 싶기도하고
꿈 속 내용이며 상황이 너무 재미있어서 웃음이 났다.

교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리에게 꿈 이야기를 들려줬더니
리가 재미있는 설문조사 내용을 알려주었다

미국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행복지수를 조사한 결과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비율이
기혼남성 – 미혼여성 – 기혼여성 – 미혼남성 순이 었다고 한다.

결혼을 이야기 하고 바라는 쪽은 여성이 많지만
(미국에서 조차) 막상 결혼이 필요한 쪽은 남성이라는 얘기.

이 단순한 설문 결과를 가지고 여러가지 재미있는 분석이 가능하다.
‘기혼남성과 미혼여성이 인기가 있는 것은 그들이 상대적으로 행복하기에
더욱 멋스러워 보이기 때문’ 이라거나
‘미혼남성은 미혼여성에게 극진히 대하지만 결혼 후에는
기혼여성이 기혼남성에게 극진히 대하기 때문’ 이라거나

아무튼 오랜만에 찾아온 재미난 꿈 덕분에 모처럼 즐거운 상상을 해보았다.

설마 예지몽?.. 쿨럭 ㅡㅡ;;;

우종에게 – 1995년 1월

우종에게

가끔씩은,
생각나는 이름이 있습니다.

편지 속에 담겨온
갑절의 정겨움.

악의와 오해는
시공의 차 속으로,

함께 했음의 즐거움은
그리움으로, 그리움으로,

소중함의 인식은
결여에서 옵니다.

가끔씩은 부르고픈
이름이 있습니다.

– 1995년 1월, 우종에게 –